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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닿는 곳, 그보다 조금 아래서 잿빛 털로 덮힌 귀가 살랑인다. 검은 머리 사이로 솟은 귀는 어제오늘 색이 달랐다. 먹에 물들 듯 점차 제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꽃이 지고, 새싹이 돋으며, 형형색색 바뀌는 풍경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 계절의 순환을. 시간의 흐름을 이 아이를 통해 체감한다. 안테이아님. 그는 자신이 답하지 않자 재차 물어오는 앳된 목소리를 듣고서 사념을 그만두었다. 부드럽게 되물으며 아이의 말을 이끌었다.

 

벌어지던 조그마한 입술이 닫혔다. 한 겨울 서리를 닮은 눈동자는, 드넓은 바다를 닮은 눈동자에 내포된 감정을 읽으려는 드는 것처럼 눈을 마주치다, 도르르. 왁스칠을 해 반짝이는 나무 바닥과 끓고 있는 시약 따위를 훑곤 돌아왔다. 꼬리가 천천히 흔들리는 모양을 보건대, 혼날 걱정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케인, 나긋한 음성이 이름을 담자 귀가 쫑긋 움직이며 다물어진 입술이 열렸다.

 

“…저 봤어요. 사람들이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걸요.”

 

위협적인 붉은빛이 일렁이며 산 아귀 마을을 가득 메우던 때를 회상했다. 타닥, 타닥 심지가 타고, 맑은 공기에 섞인 매캐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마치 노을이 집어삼킨 양 밝은 풍경은 도무지 한밤이라 믿을 수 없었다. 시간이 늦어 사람이 없을 거라는 판단은 오산이라는 것처럼 빼곡하게 들어선 인파. 반복적으로 들려오던, 주문과도 같은 말. 기이한 사람들의 형색까지. 케인은 제 귀를 누르며 소리의 저편으로 사라져야 했다. 잭 오 랜턴의 촛불이 한창 타오를, 딱 이맘 때였다.

안테이아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늦가을의 한기를 이길 수 없던 밤. 제 품에 안겨있을 아이를 찾아 움직인 팔은 시트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고운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팔을 허우적거려도 옆에서 느껴져야 할 온기는 잡히지 않았다. 없다. 없다고? 어찌 몸을 급하게 일으켰는지 한참 동안 형편없이 구겨진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불어버린 아이 또한 이를 깨닫고 작은 손으로 옷 끝을 움켜쥐었다.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고 겁주는 거예요.”

“……네?”

 

말문이 막혔다. 말미부터 힘이 빠져 쥐고 있던 옷을 놓고 팔이 툭 아래로 떨어진다. 멀리서 보았던 불빛과 마을 인근까지 들려오던 반복적인 목소리에 놀래킨 사람도 없이 제대로 당해버린 억울함은 아주 잠깐 떠올랐다, 흐려졌다. 황당함이 서린 낯빛과 다르게 마주보고 선 이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랑한 뺨을 꼬집었다. 힘을 싣지도 않았건만, 부드러이 어루만지고 떨어진 손길이 흐물흐물 마음을 녹여버린 탓이었다.

 

“케인만 좋으면, 올해는 잭 오 랜턴도 만들고 사탕도 받으러 갈까요?”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예요. 가장을 했다고 생각할걸요.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가 조그맣게 내려앉는다.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두 뺨이 감싸였다. 이 온기를 느끼고도 싫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온기가 옮겨붙어 발갛게 달뜬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좋, 아요. 케인은 사시사철 봄볕 같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가느다랗게 비치는 햇살로 엮은 듯 밝고 옅은 머리가 하나로 땋여 시야 안에서 살랑거렸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마을로 내려가도 괜찮아요?”

“어머, 받을 바구니도 골랐잖아요.”

 

콧잔등을 톡 치는 모양이 꽃잎 위에 나비가 앉았다 날아가는 것처럼 가볍다.

그대로 유려한 선을 그려 마법을 부릴 것만 같은 움직임을 보며 바구니를 꼭 쥐었다. 안테이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말을 덧붙이는 대신 자그마한 손을 포개어 잡았다. 손과 얼굴. 최소한의 면적만 내놓은 로브가 크고 굵은 주름을 만들며 무겁게 붙어오는 느낌이, 안온한 집을 나서는 긴장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려져 누구랄 것 없이 존재를 숨기고 숨어드는 날. 죽은 자들이, 이날을 명분 삼아 보고 싶었던 이를 보러 간다는 풍문은 본래의 의미가 빛바랜 뒤에도 유구하게 들려오곤 했다.

태어난 곳을 떠나 몇 번이나 터전을 바꾼 그로서는 소중한 이를 만나는 애절함은 물론, 어린아이에게 줄 과자를 한 아름 준비해두고서 설렘을 지키는 일도 까마득히 먼 일이 되었다. 먼지가 쌓인 사탕단지. 그 안의 언제 사두었는지 모를 사탕이 그에게 있어 추억이 자리한 위치일 터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은 겁먹고 움츠릴 필요 없어요.”

“그래도… 조금 무서워요. 제 옆에 꼭 붙어 계셔야 해요?”

“아하하, 케인이 무섭지 않게 손잡고 같이 받으러 다녀야겠네요.”

 

안테이아는 제 손을 붙잡은 케인을 내려다봤다. 허벅지를 조금 넘어서는 키는 귀까지 포함하면 더 길 듯싶었다. 보는 시야가 달라서일까. 그는 자신이 잊었던 사탕단지 위에 앉은 먼지를 닦고 안에 든 사탕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아, 그런 게 있었지. 여기서 자신의 사고가 멈추지 않게 꼬리를 문다. 둘의 대화는 그렇게 이어져왔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경험이라 한들 찰나에 담긴 이야기를 어떤 동화의 뒷이야기보다 궁금해 했다. 입술을 움직이고 목소리를 틔울 때면 꺄르르. 아이 웃음소리가 섞이지 않는 때가 없었다.

생존하느라 놓았던 것을 이젠 해도 괜찮다고 알려준 아이에게 새 사탕을 쥐어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를 거니는 느낌이 괜찮았다. 과자가 들어찬 바구니를 보는 아이의 눈은 주황빛으로, 또 노란빛으로 평소엔 보지 못할 색을 담고 반짝였다. 

“아직도 무섭기만 해요?”

“이제 안 무서워요. 우리 다음엔 이거 벗고 와요.”

 

마녀 모자도 쓰고, 빗자루도 들고요. 로브를 잡아당기며 덧붙이는 목소리가 밝았다. 하얀 손이 살며시 동그란 머리로 올라 쓰다듬는다. 여전히 파란 눈이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그럴까요? 같은 가장은 재미없을 테니까.”

“제가 자라서 사탕을 못 받게 돼도…… 그때도 와요!”

“할로윈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잿빛 눈동자가 한참 위에 있는 얼굴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보라색 물이 들어야 했을 머리카락은, 더 희고 밝아 보였다. 사람들 사이를 거닐어도 이상한 시선이 따라붙지 않는 일은 유쾌한 것이 맞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발맞춰 줄 사람이었다. 고로, 고개를 끄덕이면 끝나는 단순한 물음이었다. 여러 빛이 잦아들고서야 대답했다. 뛰어 올라가면 두 사람의 보금자리가 있는 산 아래였다.

 

“……같이 나와서 좋은 거예요.”

“나도 케인이 있어서 좋았어요.”

 

걸음에 맞춰 바구니가 흔들렸다. 시월의 찬바람 사이로 달짝지근한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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