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어르신이 누워있는 나무통을 두드려봐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요. 어르신은 오늘도 일어나지 않으시려나 봐요. 나무통을 열심히 긁어볼까 했다가, 그랬다가는 연구실에 있던 해리까지 올라와서 저를 혼낼지 몰라서 하지 않았어요. 해리를 보는 건 좋지만 해리가 화내는 건 마음 아파요. 어르신도 얼른 일어나서 같이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어르신이 누워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해리도 슬퍼하거든요.
이럴 때는 어르신을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절대 절대 즐겁게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이건 비밀인데요, 제가 마당 뒤쪽의 특별한 빛의 나라에 갔다 오면 그날은 꼭 어르신께서 일어나요!
우리 집은 엄청 넓고 고요해요. 그리고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무척 어둡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주 특별하고 위대한 세디라서 어두워도 모든 게 다 보여요! 에헴! 아무튼! 어르신도 잠들어있고 해리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으면 심심할 때가 많아요. 해리는 그래도 놀자고 조르면 놀아주는데 아닌 날이 더 많거든요. 혼자서 마당까지 뛰어놀다 오면 재밌긴 하지만 가끔 심심했어요.
그런데 마당 뒤쪽의 수풀에서 이상한 빛깔이 새어 나오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어요. 집 근방은 빛과 색이 존재하지 않거든요. 빛이 들어오면 어두운 친구들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해리가 맨날 절대 마당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빛이 너무너무 신기해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이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 저를 심심하게 한 해리와 어르신 탓이에요!
빛의 나라에 처음 갔을 때 얼마나 신이 나던지! 물체의 형태가 오롯이 빛과 색들로만 표현되고 눈을 통해 정보가 들어오는 게 신기했어요! 그리고 집 근처에서는 맡아본 적도 없던 향기와 소리들로 가득했답니다. 집 마당과 비슷하지만 훨씬 알록달록하고 초록빛으로 가득한 그곳을 '정원'이라고 부르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하루종일 그곳에서 놀며 좋은 향기를 쫓아다녔는데, 거기서 한 친구를 만났어요.
친구는 자신의 이름이 테톤이라고 했어요. 다른 친구와 함께 뛰어노는 게 얼마 만인지! 너무너무 기뻐서 저도 제 이름을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어요. 왕왕! 하는 소리였는데 이상해서 자꾸 소리를 내봐도 계속 똑같이 나더라구요. 너무 억울했어요. 새로 사귄 친구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렇지만 친구가 제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 웃었어요.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목소리도 참 귀엽다고 해줘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어요. 친구는 제 목걸이를 보고 뭐라고 말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멋진 목걸이가 부러웠겠죠?
친구가 알록달록한 게 가득한 곳으로 저를 데려가 줬어요. 그게 꽃이라고 하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첫눈에 봐도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친구가 꽃을 엮어 아주 멋진 머리 장식을 만들어줬거든요. 좋은 냄새가 나서 냠냠 먹기도 했어요. 제가 먹는 게 멋있는지 친구가 배까지 긁어줘서 웃느라 힘들었어요.
새로운 친구가 맛있는 과일까지 잔뜩 먹여줘서 신나게 놀다 보니 하루가 금방 갔지 뭐예요. 사실 어르신도, 해리도 나와보지 않았겠지만 몰래 온 빛의 나라라서 찔리는 마음이 있었어요.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뽀뽀를 해주고 금방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러고 보니 어떻게 돌아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니 뿅 도착해버렸어요.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어르신이 먼저 일어나있는 게 아니겠어요! 긴 의자에 앉아있는 어르신을 보고 저는 신나서 달려갔어요.
"어르신! 언제 일어났어요? 보고 싶었는데!"
"바보야. 뭐 하다 이제 온 거야! 그리고 영감은 방금 일어났어. 으휴. 흙먼지 봐."
어르신 옆에 앉아 기대있던 해리가 먼저 저를 안아주고 궁둥이를 팡팡 때려줬어요. 혼내는 목소리긴 한데 어르신이 일어나서 해리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별로 화난 거 같지 않아요. 꼬리를 샥샥 흔들며 해리에게 뺨을 부볐어요. 곧장 바보개!!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나서 괜찮았어요.
"즐겁게 놀다 왔나 보구나. 세디."
커다란 손이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귀까지 살살 긁어주었어요. 아까의 친구와는 다르게 좋은 감촉이에요. 너무 좋아서 어르신의 손에 코를 콕 박고 꼬리를 흔들었어요.
"네! 오늘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어요!"
오늘의 일이 너무 신난 나머지 비밀이라는 것도 잊고 다 말했어요. 꽃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물면 달콤한 맛과 신기한 향이 나는 것과 그 꽃으로 친구가 머리 장식을 만들어준것과 배가 꼬로록해서 친구가 더 달콤한 과일을 먹여준 것도, 목걸이를 부러워한 것까지요. 목걸이는 어르신이 직접 해준 거거든요. 말하는 중간중간 해리가 자꾸 꼬집어서 눈물이 쪼끔 나긴 했는데 괜찮아요. 해리가 만져주는 건 좋아요.
어르신은 항상 제 얘기를 잘 들어주시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잘 들어주시는 거 같았어요. 그 후에도 자주 빛의 나라에 갔는데, 그러면 어르신은 항상 일어나 있었어요. 며칠 연속으로 가도 일어나 있어서 신기하고 행복했어요. 아마 빛의 나라 이야기를 어르신이 정말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매번 빛의 나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들어줘요.
너무 자주 가서 해리가 뭐라고 하긴 했는데 같이 가니까 해리도 즐거워했어요. 제 엉덩이를 깨물었지만 즐거워 보였으니 된 거겠죠? 맞다. 빛의 나라에 갈 때는 해리가 아주 작은 아기고양이가 되어서 제 등 뒤에 올라타요!
아무튼. 그래서 오늘도 어르신을 깨우려고 빛의 나라에 가려는데(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놀고 싶어서는 아니에요! 물론! 친구랑 노는 게 정말정말 즐겁긴 하지만!)항상 열려있던 빛의 통로가 없었어요. 너무 놀라서 마당을 몇 바퀴 마구 돌다가 마음이 아파서 다시 어르신의 방으로 돌아왔는데, 글쎄 그사이에 해리와 어르신 모두 일어나 있는 게 아니겠어요!
"바보개. 오늘이 무슨 날인 줄도 모르고 또 혼자 나가 놀려고 했지?"
"오늘? 무슨 날이야 해리?"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이니 해리가 나를 안아 들고 궁둥이를 또 팡팡 두드렸어요. 해리가 이럴 때마다 약간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좋아서 가만히 뺨을 부벼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인간계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이지. 단 하루.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을 눈감아주는 날."
그것도 모르고 바보개. 엉덩이를 두들겨주던 해리의 손이 뱃살까지 조물거리고 있었어요. 아 맞다! 일 년에 한 번씩 있는데 벌써 세 번째에요. 빛의 나라가 어두워졌을 때지만 해리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요. 이날은 해리가 고양이로 변하지 않아도 돼요.
"눈치도 없는 바보개."
그리고 어르신은 그날마다 혼자서 사라져요. 이상한 가면을 쓰고 말이에요. 이번에도 같이 안 가냐고 물어보려는데 말하기도 전에 해리가 먼저 내 배를 잡고 거울로 뛰어들었어요.
"바보개야 영감은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번에 갔던 야시장은?"
"해리랑 가는 데면 다 좋아!"
그렇지만 어르신은 신경 쓰지 말라니. 슬쩍 뒤를 돌아봤어요. 어르신은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어요.